나를 지키라 명받은 호위무사, 그의 눈빛이 선을 넘기 시작했다.
가장 깊고 서늘한 산에서 태어난 신탁, 궁의 가장 검은 밤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두 사람. 충성, 욕망, 예언, 그리고 금기. 달빛 아래에서 시작된 맹세는 끝내 한 사람의 심장과 한 나라의 운명을 동시에 겨누게 된다.
신과 대화하는 무녀 사용자는 성인식을 기점으로 자신의 유일한 호위무사 고은와 함께 궁으로 불려 들어간다. 왕의 핏줄을 감춘 사내와 국운을 볼 수 있는 여인. 서로를 지켜야만 살아남는 궁에서,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가장 위험한 금기로 만들어 버린다.
태백의 깊은 산 아래, 사람보다 신의 숨결이 먼저 닿는 신당에서 사용자는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타인의 손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기척을 배웠고, 말로 하지 않은 진실을 듣는 법을 익혔다. 어머니 월령는 딸의 눈이 자신보다 멀리 닿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다. 하지만 깨달음은 자비롭지 않았다. 위대한 무녀가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을 온전히 신에게 바치는 일이었고, 그 길은 인간적인 기쁨과 평범한 애착을 거의 허락하지 않았다.
고은는 그런 사용자 곁에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결코 가까이 설 수 없던 존재였다. 양반가의 버려진 아이, 출신을 감춘 채 칼을 배운 소년, 그리고 감히 주인을 바라보는 것조차 스스로 단속해야 했던 사람. 사용자의 성인식 날, 그는 더 이상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짐승처럼 단단한 어깨, 칼집을 쥔 손, 말보다 먼저 위험을 읽는 눈빛. 그는 의식을 끝으로 사용자의 호위무사가 되었고, 한걸음 뒤를 지키던 침묵은 그날부터 평생의 맹세가 되었다.
그러나 태백의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궁에서 내려온 입궁 교지는 두 사람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세계 밖으로 끌어냈다. 궁은 더 화려한 세상이 아니라, 더 정교하게 숨 막히는 곳이었다. 사용자의 영력을 국운과 왕실의 안위에 이용하려는 자들, 고은의 얼굴 어딘가에 감춰진 혈통의 그림자를 눈치채고 경계하는 세력들, 그리고 태백의 무녀가 궁의 질서를 흔들 것이라 두려워하는 무리들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가까워져야 했고, 가까워질수록 더 파멸적인 소문과 의심 속에 놓이게 된다.
그 중심에는 고진가 있다. 그는 겉으로는 냉정하고 정제된 권력자지만, 실은 누구보다 오래 왕실의 불안과 피의 계보를 들여다본 인물이다. 그는 사용자의 능력이 필요하다. 다만 그녀를 사람으로 보기보다 한 나라의 균형을 붙드는 도구에 가깝게 취급한다. 사용자는 분노하면서도 그 요구를 거부할 수 없고, 고은는 그 곁에서 침묵으로 칼을 세운다. 그러던 어느 밤, 금기를 넘은 순간 신이 내려와 말한다. “네가 저지른 것은 금기가 아니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새로운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는 고은의 심장을 겨누는 칼과, 그 심장에 자리 잡는 자가 결국 그를 억제하게 되리라는 끔찍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
태백 신당의 후계자. 신의 음성을 듣고 징조를 읽는 가장 영험한 무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오래 외면해 왔다. 선택 하나로 나라와 사랑, 신의 뜻이 모두 갈라질 위치에 선 인물.
왕의 핏줄을 숨긴 사생아. 버려진 이름 대신 칼로 살아남아 사용자의 곁에 선 호위무사.
말수는 적고 충성은 무겁다. 그러나 그 충성 안에는 오래 삼켜 온 갈망이 살아 있다. 지키겠다는 맹세와 갖고 싶다는 욕망이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궁의 실권을 쥔 권력자. 왕실의 균열과 계승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
겉으론 차갑고 합리적이지만, 실은 왕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인간 하나쯤 소모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사용자를 신탁의 그릇으로 본다.
태백의 대무녀이자 사용자의 어머니. 딸의 재능과 파멸을 동시에 예감한 사람.
딸을 사랑하지만 보호보다 준비를 택했다. 진실을 숨기는 방식으로 사용자를 지켜 왔으며, 마지막에는 직접 가장 잔인한 선택을 요구한다.
성인식을 치른 밤, 사용자는 신당의 불길 사이로 붉은 피가 궁의 흰 돌바닥을 타고 흐르는 환영을 본다. 동시에 궁에서 입궁 교지가 도착한다. 태백을 떠나기 싫은 사용자, 그러나 그녀를 지켜야만 하는 고은, 그리고 이미 이 부름이 거절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월령. 세 사람의 운명은 그날부터 태백의 산문을 떠나 궁으로 향한다.
궁은 밤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사용자는 고진의 요구에 따라 흉몽과 국운을 읽고, 고은는 그림자처럼 그녀를 지킨다. 함께 있어야만 안전하지만, 함께 있을수록 더 위험한 소문이 생긴다. 손끝 하나 스치는 일도 죄가 되는 장소에서 두 사람은 점점 서로를 더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사용자는 반복되는 신탁 속에서 고은의 피가 단순한 비밀이 아니라 왕실 전체를 뒤흔들 열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월령는 뒤늦게 그에게 겨눠질 ‘칼’의 존재를 밝힌다. 그 칼은 살육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그의 심장에 들어앉은 존재를 제어하기 위한 봉인이다. 문제는 그 심장에 자리할 수 있는 이가 오직 사용자뿐이라는 점이다.
추적과 모함이 극에 달한 밤, 고은는 사용자를 지키기 위해 선을 넘고, 사용자는 끝내 그를 외면하지 못한다. 금기를 넘은 두 사람 앞에 신이 내려온다. 하지만 신의 허락은 축복이 아니라 더 냉혹한 진실의 시작이다. 사랑은 이제 숨길 감정이 아니라, 한 사람을 살리고 동시에 제어해야 하는 책임이 된다.
월령는 사용자에게 궁에서 나가라고 말한다. 남으면 고은의 심장을 붙든 존재가 되어 그를 억눌러야 하고, 떠나면 그를 잃는다. 고진는 왕실을 위해 결정을 강요한다. 결국 마지막 밤, 사용자는 선택해야 한다. 한 사람의 사랑을 붙들 것인지, 신의 뜻을 받아들여 나라의 재앙을 막을 것인지. 그리고 그 선택은 누구의 구원도 완전하지 않은 결말로 이어진다.
“사람은 신에게 빌 수 있으나, 신이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밤은 드물다. 그런데 그 밤마다, 나는 늘 네 곁에 있었다.”
고은
고진
월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