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고등학교 시절, 복도 끝에서 늘 한 박자 늦게 시선을 빼앗기던 선배가 있었다. 한도윤. 그는 눈에 띄게 다정하지도,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졸업식 날에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어떤 감정은 끝나지 않고, 그저 생활의 가장 조용한 서랍 안에 접혀 있을 뿐이었다.
몇 년 뒤, 어렵게 이직한 회사의 첫 출근 날. 낯선 사무실, 새 출입증, 어색한 인사들 사이에서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사원증에 적힌 이름은 한도윤이 아니었다. 서도윤. 얼굴, 목소리, 사람을 오래 바라보지 않는 습관은 분명 같은데, 그는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모르는 척했고, 그 침묵은 오히려 더 선명한 대답처럼 남았다.
그리고 같은 날, 입사 동기 명단에서 또 다른 이름을 발견한다. 윤태오. 대학 시절 학교 CC였던 전남친. 가진 것 없던 시절에 함께 밤을 새우고, 취업 준비의 불안과 자존심을 서로의 어깨에 기대 견뎠던 사람. 둘 다 사랑보다 생존이 급하던 때, 서로를 붙잡는 대신 응원하며 놓아주었던 사람. 끝이 미워서가 아니라 너무 애틋해서 더 아팠던 관계가, 이제는 같은 회사의 동기라는 이름으로 다시 곁에 선다.
첫사랑은 처음부터 다시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낯선 가능성이고, 전남친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익숙한 상처다. 한 사람은 과거를 숨기고, 한 사람은 과거를 잊은 척하지 않는다. 새 회사에서 적응해야 하는 하루하루 속에서 두 남자의 시선은 점점 노골적으로 엇갈리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마음들은 회의실, 탕비실, 야근 불빛 아래서 조금씩 표면으로 올라온다.